흘러내리는 시계를 마주한 순간,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지속(The Persistence of Memory)》은 단 한 번만 보아도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시계는 딱딱하고 정확한 물건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그림 속에서는 부드럽게 녹아내리고 있습니다. 마치 꿈속의 한 장면처럼 현실에서는 도무지 존재할 수 없는 풍경이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낯선 이미지가 금세 우리 머릿속에 박히고, 잊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곱씹을수록 더 많은 질문이 떠오릅니다.
“왜 시계가 녹고 있을까?”
“기억은 정말 지속될 수 있는 걸까?”
“이 그림은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걸까?”
이 작품은 세계 미술사 속에서도 단연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그림을 통해 달리라는 화가를 처음 접하게 되고, 초현실주의라는 예술 사조에 흥미를 느끼게 되지요. 초현실주의는 단어 그대로 현실을 넘어선 세계를 그리고자 한 움직임입니다. 현실에서 직접 보거나 체험한 것보다는, 꿈속에서 느끼는 감정이나 무의식 깊숙한 곳에서 떠오른 상상들을 화면 위에 풀어놓습니다. 현실적인 형태와 낯선 조합, 상식과 충돌하는 이미지들로 관객의 사고를 뒤흔드는 것이 이 사조의 특징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살바도르 달리가 있습니다.
1931년, 달리는 단 24cm × 33cm 크기의 작은 캔버스에 인류가 수천 년 동안 탐구해 온 개념인 ‘시간’과 ‘기억’을 그려냅니다. 겉보기에는 아주 단순한 구성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 안에는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질문과, 작가 개인의 내면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무너져내리는 시계,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물체, 부패를 상징하는 개미 떼, 텅 빈 해안 풍경. 모든 요소가 마치 꿈속의 편린처럼 비논리적으로 배치되어 있지만, 오히려 그 안에서 우리는 설명할 수 없는 진실감을 느끼게 됩니다.
달리는 자신의 그림을 통해 무의식의 세계를 시각적으로 풀어낸 예술가입니다. 그는 현실을 충실히 재현하는 것보다, 현실 너머의 감정과 불안, 욕망과 트라우마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데 집중했지요. 특히 《기억의 지속》은 그의 예술적, 심리적 세계가 응축된 대표작입니다. 이 작품을 처음 발표했을 당시 사람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고, 그 반응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단지 이상하고 기이해서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메시지가 시대를 넘어 꾸준히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흐르지만, 사람마다 느끼는 방식은 전혀 다릅니다. 어떤 날은 하루가 너무 짧게 느껴지고, 어떤 기억은 몇 년이 지나도 어제 일처럼 생생합니다. 달리는 이런 ‘심리적인 시간’을 시계의 녹아내림이라는 독특한 이미지로 표현했습니다. 이 시계는 더 이상 시간을 측정할 수 없습니다. 기능을 잃어버린 시계는 흐르지 않고 멈춰 있습니다. 그런데 그 멈춤이 오히려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이 믿는 시간은 과연 무엇인가요?”
이 그림이 많은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는 이유는, 그것이 미적인 아름다움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인간적인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지요. 기억은 사라지는 것일까요, 아니면 계속해서 우리 안에 남아 있는 것일까요? 시간이 녹아내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죽음은 시간의 끝일까요, 아니면 또 다른 형태의 지속일까요?
이 블로그에서는 여러분과 함께 이 그림 속에 숨겨진 의미를 하나씩 들여다보려고 합니다.
달리라는 인물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의 무의식 세계는 어떤 방식으로 그림에 녹아들었는지,
그리고 초현실주의라는 예술 사조가 왜 이토록 독특하고 매혹적인지를 차근차근 살펴볼 예정입니다.
《기억의 지속》은 아주 조용한 그림입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시간은 흐르고, 기억은 사라지며, 인간은 존재를 묻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이 여정에 함께하시면서,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감정과 생각들을 새롭게 발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부터 그 여정을 시작해 보겠습니다.
1 시계는 왜 녹아내리는가 – 초현실주의의 상징과 해석
《기억의 지속》을 처음 보시는 분들이 가장 먼저 눈길을 주는 요소는 아마도 ‘흘러내리는 시계’일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시계는 원래 단단하고 정확해야 합니다. 시간을 재기 위해 만들어진 기계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달리의 그림 속 시계는 고체가 아닌 액체처럼 보입니다. 마치 열에 녹아 흐르듯, 힘없이 늘어져 있습니다. 살바도르 달리는 이 시계를 통해 ‘시간’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해석하려고 했습니다.
시계는 인간이 만든 시간의 상징입니다. 초, 분, 시로 나뉘고, 하루 24시간, 일주일 7일, 1년 365일처럼 정확하게 나누어져 있지요. 우리는 늘 이 시간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학교나 직장에서의 일정, 약속 시간, 하루의 계획도 모두 시계를 통해 움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체감하는 시간은 꼭 그렇게 일정하지 않습니다. 즐거운 시간은 금세 지나가고, 지루한 순간은 끝없이 느껴지지요. 슬픈 기억은 오래 남고, 기쁜 순간은 빠르게 지나가 버리기도 합니다. 달리는 이처럼 사람마다 다르게 느껴지는 시간, 즉 ‘심리적인 시간’을 시각화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시계가 ‘녹는다’는 발상을 통해 고정되고 절대적이라고 여겨지는 시간을 해체합니다. 시계가 흐물흐물해지면서, 시간 역시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더 이상 정해진 틀이나 규칙 안에 갇히지 않고, 상황과 감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존재로 그려진 것입니다. 이는 초현실주의가 추구한 세계관과도 잘 맞아떨어집니다. 초현실주의는 현실 세계의 논리와 질서를 벗어나, 꿈이나 무의식과 같이 비논리적인 세계를 표현하는 예술 운동이었습니다. 달리는 이 흐물거리는 시계를 통해, 우리가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시간의 개념조차 의심하고 새롭게 바라보게 만듭니다.
이 시계는 어디에 놓여 있을까요? 하나는 기이한 생물체 위에 걸쳐 있고, 또 하나는 각진 구조물 위에 축 늘어져 있습니다. 나뭇가지 끝에도 시계 하나가 힘없이 매달려 있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위치에 놓인 시계들은 마치 시간의 방향이나 질서가 존재하지 않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달리는 시간의 선형적인 흐름, 즉 과거-현재-미래라는 순서를 거부하고, 그것이 뒤섞이거나 멈추거나, 혹은 녹아 없어질 수도 있다는 상상을 그려낸 것입니다.
이 시계를 떠올리게 된 계기도 재미있습니다. 달리는 실제로 한 여름날 저녁, 녹아내리는 카망베르 치즈를 보며 이 작품의 발상을 떠올렸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접시 위에서 천천히 무너져 내리는 치즈의 모습이 마치 시계처럼 느껴졌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직관적 이미지에서 출발해, 달리는 물리적 현상과 심리적 감각을 하나의 시각적 은유로 결합한 것입니다.
그림 속 주황색 회중시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위에 개미들이 무리를 지어 기어 다니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개미는 종종 부패와 죽음의 상징으로 해석됩니다. 달리는 어린 시절, 죽은 동물의 시체 위에서 개미들이 우글거리는 모습을 보고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회상했습니다. 그렇다면 시계 위의 개미는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시간의 끝, 즉 죽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시간을 재는 도구가 생명을 잃고, 그 위에 개미가 들러붙어 있다는 사실은, 시간이 결국 사라지거나 썩어버리는 존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림 속에는 세 개의 시계가 존재하지만, 어느 하나도 제 기능을 하지 않습니다. 바늘이 가리키는 시간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 보이고, 시계의 형태는 흐트러져 있습니다. 이 모습은 마치 꿈에서 느끼는 시간 감각과도 비슷합니다. 꿈속에서는 몇 초 만에 몇 시간을 경험하기도 하고,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존재하기도 합니다. 달리는 꿈과 무의식의 세계에서의 시간 개념을 현실로 끌어오고자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시계들은 실제로는 존재할 수 없는, 그러나 감정적으로는 매우 강렬한 인상을 주는 이미지로 다가옵니다.
또한 이 시계들은 그 자체로 완전히 해체되기보다는, ‘지속’이라는 개념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녹아내리고 있지만,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기억과도 닮아 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기억은 흐릿해지고 왜곡되지만,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형태만 달라질 뿐, 우리 안에 계속 머물며 영향을 줍니다. 달리는 이 점을 시계라는 이미지 안에 절묘하게 담아냈습니다. 시계는 흐르지 않지만, 존재합니다. 그것은 곧 ‘기억의 지속’이라는 제목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달리의 시계는 결국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에게 시간은 어떤 모습인가요?
그것은 늘 일정하게 흐르는 존재인가요, 아니면 감정과 기억에 따라 자유롭게 변하는 무형의 감각인가요?
《기억의 지속》은 시간을 시계라는 도구로만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을 뒤흔듭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이상한 이미지를 넘어서 자신의 삶과 기억, 감정과 죽음을 돌아보게 되는 것이지요.
2 달리의 무의식과 파라노이아 기법 – 예술로 표현된 내면
살바도르 달리는 단지 눈에 보이는 세계를 그리는 데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즉 내면의 세계와 무의식의 감정을 그리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초현실주의라는 예술 운동은 바로 이 무의식과 꿈, 억눌린 감정, 불안정한 심리를 예술로 표현하는 흐름이었고, 달리는 이 흐름을 대표하는 가장 독창적인 작가 중 한 명이었습니다.
달리의 그림을 보면 형태는 뚜렷한데, 그 의미는 쉽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분명히 무언가를 그린 것 같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확신하기 어렵고, 동시에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집니다. 이러한 효과는 작가가 의도적으로 만든 착각입니다.
그는 현실과 무의식, 이성과 감정, 논리와 모순이 뒤섞인 세계를 만들어내고자 했습니다. 그 중심에는 바로 ‘파라노이아-비판 기법(Paranoiac-critical method)’이라는 독특한 창작 방식이 있습니다.
이 기법은 말 그대로 ‘편집증(paranoia)’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입니다. 편집증은 현실과 상상을 구분하기 어렵게 만드는 정신 상태로, 보통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됩니다. 하지만 달리는 이러한 편집증적 사고를 창작의 자극제로 사용했습니다. 그는 하나의 사물을 보면서 동시에 전혀 다른 이미지를 떠올리고, 두 가지 이상의 의미가 겹쳐 보이게 만드는 시각적 환상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냈습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그림을 보는 순간 고정된 해석을 떠올리기보다는, 본능적으로 ‘해석하고 싶어지는 욕구’를 느끼게 됩니다.
이런 기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기억의 지속》 속 괴상한 생물체입니다. 이 생명체는 누워 있는 듯 보이지만, 몸의 형태나 자세가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긴 속눈썹이나 부드러운 코의 윤곽 같은 인간적인 특징이 보이기도 하고, 또 다른 방향에서 보면 생물이 아니라 무언가 녹아내린 물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단일한 해석이 불가능한 이미지는 보는 사람마다 서로 다른 해석을 하게 만들고, 결국 스스로 상상력을 동원해 의미를 구성하게 되지요.
이것이 바로 달리가 의도한 파라노이아적 접근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그림 앞에서 멈춰 서게 만들고, 의문을 갖게 하며, 기존의 판단 체계를 의심하게 유도합니다. 그리고 그 혼란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무의식과 마주하게 됩니다. 달리는 그림을 통해 현실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의 ‘불안정함’과 ‘불확실성’을 드러내려고 했던 것입니다.
달리의 개인적인 삶 역시 이 기법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매우 민감하고 복잡한 감정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특히 자신보다 먼저 태어났다가 요절한 형과 같은 이름을 물려받은 사실은, 그의 정체성에 큰 혼란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는 “나는 진짜 살바도르가 아니다”라는 말을 자주 했고, 실제로 살아 있는 자신이 죽은 형의 그림자처럼 느껴졌다고 회상했습니다. 이런 감정은 결국 ‘나는 누구인가’라는 존재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졌고, 그는 그 질문을 캔버스 위에서 풀어내기 시작했습니다.
《기억의 지속》에서도 이 자아의 불안정함이 드러납니다. 시계는 흐르고, 형태는 무너지고, 배경은 비현실적입니다. 그리고 중심에 놓인 괴이한 생명체는 정확한 신체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는 곧 정체성이 명확하지 않은 존재, 즉 달리 자신이 느끼는 ‘불완전한 자아’의 시각적 표현일 수 있습니다. 달리는 자신의 트라우마와 심리 상태를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예술로 승화시켰습니다. 그는 자신의 무의식과 직접 마주했고, 그 과정을 예술로 남겼습니다.
이와 같은 표현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마음이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뉘며, 무의식에는 억눌린 욕망, 특히 성적인 욕망이 자리한다고 보았습니다. 달리는 프로이트의 이론에 큰 영향을 받았고, 실제로 그를 만나기 위해 비엔나까지 찾아갔을 정도로 그를 존경했습니다. 달리는 꿈과 욕망, 불안, 트라우마를 작품의 주제로 삼았고, 이를 통해 우리가 감춰왔던 감정들을 꺼내 보이려 했습니다.
달리의 무의식 표현은 시각적 기교와도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는 매우 뛰어난 묘사력을 가지고 있었고, 사실적인 묘사를 통해 환상을 더 강렬하게 만들었습니다. 그가 그린 시계는 형태는 흐물흐물하지만, 그림자나 빛의 묘사는 매우 정밀하여 진짜처럼 보입니다. 이처럼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방식은 시청각적 충격을 극대화하며, 관람자에게 더욱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달리는 스스로를 ‘광기가 없는 미친 사람’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는 혼란스럽고 격렬한 감정을 예술로 표현하면서도, 냉정하게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작품은 그 혼란의 기록이자, 동시에 자신을 치유하고 통제하는 방식이기도 했습니다. 파라노이아-비판 기법은 바로 그 치열한 내면의 투쟁에서 비롯된 창작 방식이며, 단지 독특한 예술적 표현을 넘어서 자기 존재를 이해하고자 하는 진지한 시도였습니다.
3 기억과 시간, 그리고 죽음 – 심리적 해석과 철학적 사유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지속》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시각적 이미지를 넘어서 깊은 철학적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기억은 정말 지속될 수 있을까요?”
“시간이 흐른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일까요, 아니면 또 다른 형태의 시간일까요?”
이 작품은 우리가 일상에서 당연하게 여겨왔던 시간의 개념에 의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특히 시계가 녹아내리는 장면은 시간이라는 개념이 결코 단단하거나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지요. 우리가 체감하는 시간은 일정하지 않고, 오히려 감정과 기억에 따라 달라지며, 때로는 사라지기도 합니다.
인간은 늘 시간 안에서 살아갑니다. 하루하루가 흘러가고, 그 속에서 우리는 늙고, 경험하고,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시간은 단지 숫자로만 구성된 흐름은 아닙니다.
누군가에게는 같은 1분이 너무나 짧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고통스러울 만큼 길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시간의 상대성은 물리학적인 측면이 아니라, 심리적이고 정서적인 차원에서 더 극명하게 나타납니다.
《기억의 지속》에서 달리는 이 ‘심리적인 시간’을 그림으로 표현합니다.
작품 속 시계들은 작동하지 않습니다. 바늘은 멈춰 있고, 시계는 흐물거리며 제 기능을 잃은 듯 보이지요.
하지만 그것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그 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 기억 속의 시간과도 닮아 있습니다.
시간은 흘러갔지만, 그 기억은 여전히 마음속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기억은 종종 시간이 지나면서 흐릿해지고, 때로는 왜곡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삶의 특정한 순간에 불쑥 떠오르거나, 잊은 줄 알았던 장면이 꿈속에 나타나기도 하지요.
달리는 바로 이러한 ‘지속되는 기억’의 개념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시계가 녹아내리고 있지만, 그것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림 속 개미 떼 역시 중요한 상징입니다.
달리는 어린 시절, 죽은 동물의 사체 위에 들러붙은 개미들을 보며 강한 공포심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 그는 작품 속에 종종 개미를 등장시켜, ‘죽음’이나 ‘부패’, ‘시간의 소멸’을 상징하곤 했습니다.
《기억의 지속》에서도 개미는 시계 위에 몰려 있으며, 시간이라는 개념이 결국 죽음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는 암시처럼 느껴집니다.
죽음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존재의 한계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모두 이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달리는 이 죽음을 종말로만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시간과 죽음, 기억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가 죽음이라는 개념을 통해서야 비로소 삶의 의미를 더 깊이 느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을 향한 존재’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죽는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그 삶이 더욱 의미 있게 느껴진다는 것이지요.
달리 역시 《기억의 지속》을 통해 삶의 유한함과, 그 안에서 지속되는 감정과 기억의 힘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시계가 멈추고, 녹아내리며, 사라지는 순간에도 인간의 기억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점을 그는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또한 이 그림은 정지된 한순간을 담고 있음에도, 관람자에게 시간의 흐름을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그림을 보고 있는 우리는, 멈춰 있는 시계를 바라보면서 오히려 시간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시간은 과연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 걸까요?
과거로부터 현재를 지나 미래로 향한다는 선형적인 흐름만이 전부일까요?
아니면 기억 속의 시간처럼, 끊임없이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고 순환하며 반복되는 걸까요?
《기억의 지속》은 바로 그런 질문을 던지는 작품입니다.
그림을 본다는 행위는 우리 안의 생각과 감정을 끄집어내는 여정이 되기도 합니다.
달리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시간을 되묻고, 기억의 가치를 상기시키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예술로 다독입니다.
여러분은 이 그림을 보시면서 어떤 기억이 떠오르셨나요?
혹은 시간이란 개념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요?
누구나 기억을 품고 살아가고, 그 기억은 다시 시간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우리 모두를 언젠가 다른 곳으로 데려다줄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에게 남는 것은 결국 삶을 통해 경험한 감정과 그것을 담은 기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달리는 그 사실을 그림 속 녹아내리는 시계에 담아 말없이 전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요.
녹아내리는 시계, 그리고 우리 안의 기억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지속》은 누구에게나 생경한 이미지를 안겨주면서도, 이상하게도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그림입니다. 시계는 녹아내리고, 배경은 침묵하며,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듯하지만 직접적으로 말을 걸어오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림 앞에 오래 머물러 있을수록, 우리는 차츰 그 안에 담긴 의미를 느끼게 됩니다.
이 작품은 관람자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게 하는 거울이기도 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과 ‘기억’, ‘존재’에 대해 천천히 되묻는 철학적인 질문이기도 하지요.
그림 속의 시계는 더 이상 시간을 측정하지 않습니다.
녹아내리는 모습은 불완전함, 유동성, 그리고 무력함을 보여주지만, 그렇다고 무의미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기능을 잃고도 그 자리에 남아 있는 이 시계는, 무언가를 기억하고 증언하는 듯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우리가 지나온 시간들, 잊지 못할 감정들, 언젠가 마주쳤던 순간들이 마치 이 시계들처럼, 녹아내리는 동시에, 계속해서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달리는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며, 그것을 화면에 그려낸 예술가였습니다.
그의 작업은 기술적 재현보다 심리적 고백에 가까웠고, 그만큼 진실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죽은 형에 대한 복잡한 감정, 아버지와의 갈등, 그리고 자신 안에서 끊임없이 소용돌이치던 불안과 욕망을 시계, 개미, 녹아내린 물체 같은 이미지들로 바꾸어 풀어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단지 작가 개인의 고백에 머물지 않고, 우리 모두의 공통된 경험과도 이어집니다.
시간에 대해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과거의 기억 속에 오래 머물러 있는 순간이 있었을 것이고, 시간의 흐름 앞에서 무력함을 느낀 경험도 분명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잊혀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혹은 반대로 잊혀지지 않아 힘들었던 기억 또한 우리 안에는 자리하고 있습니다.
《기억의 지속》은 그런 감정들을 말없이 끄집어내 줍니다.
기억은 흐려지기도 하고, 때로는 왜곡되기도 하며, 의도치 않게 우리를 괴롭히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완전히 사라지는 일은 드뭅니다.
어느 형태로든 마음속 어딘가에 남아 우리를 형성하고,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해주지요.
이 작품은 바로 그 기억의 지속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이 작품은 시간에 대해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대부분 시간을 통제하려고 합니다.
계획을 세우고, 스케줄을 짜고, 하루하루를 관리하면서 살아가고 있지요.
하지만 그림 속 녹아내리는 시계처럼, 시간은 늘 우리가 원하는 대로 흐르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때로 시간이 너무 빠르다고 느끼고, 또 어떤 날은 멈춰버린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달리는 그러한 시간의 모순성과 불확실성을 시계라는 상징으로 시각화했고, 그 안에 인간 존재의 불안정함까지도 담아낸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주제 역시 이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습니다.
시간은 곧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흐름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달리는 죽음을 단절의 순간이라기보다는, 기억과 감정이 다른 방식으로 지속되는 지점으로 바라본 듯합니다.
개미가 몰려 있는 시계는 분해와 소멸을 상징하지만, 그 역시 사라짐이 아닌 변형으로 해석해볼 수 있지요.
그림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모든 것이 녹아내릴 수는 있지만, 그 흔적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이지요.
그림 한 장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말도 하지 않고, 소리도 내지 않으며, 움직이지도 않는 대상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오랫동안 마음속에 남아 무언가를 흔들 수 있다는 사실은 언제나 놀랍습니다.
《기억의 지속》은 바로 그런 그림입니다.
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할 수 있고, 자신만의 기억과 감정을 투영할 수 있으며, 해석할수록 더 많은 것을 되묻게 만듭니다.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정답을 찾으려고 애쓰기보다
그림이 우리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지를 차분히 지켜보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이 초현실주의가 원했던 태도일지도 모릅니다.
논리를 뛰어넘는 감정의 움직임,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내면의 흐름.
달리는 이 모든 것을 하나의 작은 캔버스에 담아냈고, 우리는 그 안에서 자신을 마주하게 됩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께서도, 달리의 시계를 통해 자신의 시간과 기억, 감정과 상처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셨기를 바랍니다.
예술은 때로 이해를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바라보게 하고, 느끼게 하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기억의 지속》은 바로 그런 작품입니다.
말하지 않아도 말을 건네고, 멈춰 있어도 우리를 흔드는 그림.
그림은 그대로인데, 우리가 바뀌는 경험.
그것이야말로 예술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 아닐까요?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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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MA (Museum of Modern Art). (n.d.). The Persistence of Memory by Salvador Dalí. https://www.moma.org/collection/works/79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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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pedia contributors. (2024). The Persistence of Memory. 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The_Persistence_of_Mem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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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neybongbong 미술블로그. (2023). “살바도르 달리, 기억의 지속 해석”. https://honeybongbo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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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unch 작가 브륀. (2022). “녹아내리는 시간 – 기억의 지속 읽기”. https://brunch.co.kr/@3c4378ea225b4ef/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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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obersky 미술노트. (2023). “살바도르 달리와 꿈의 세계”. https://octobersky2020.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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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이론연구소. (2020). 「초현실주의와 무의식의 이미지」. 예술학연구, 28(2), 4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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